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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투자와 역사

by 아재상식 2022.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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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아재상식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투자와 역사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1. 메디치 가문

16세기 ~ 18세기에 번성했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를 지배하던 가문으로 유력한 은행업자에서 유럽의 귀족 사회로 진입하게 된 이후

1465년 백합 문장을 수여를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메디치 가문과 그 수장이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를 높이 평가하여 해주면서 명문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인해 역사속을 사라졌다.

 

 

2. 메디치 가문의 투자제안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가문이다. 나아가 세계 경제와 역사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가문으로, 지금도 메디치가 이야기는 전설로 전해지며 드라마와 책으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메디치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고 평가받는 비에리 디 캄비오 메디치는 1388년 메디치가의 은행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는 시장을 돌며 환전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진짜 큰돈을 환전하는 곳은 시장이 아니라 교황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 나라에서 거둔 교회 헌금이 교황청으로 모였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을 찾아간 그는 각국에서 거둔 헌금을 모두 로마 돈으로 환산해 메디치 은행에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가장 싼 환율로 환전해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결국 이를 성사시켰다. 

사실 이 제안은 모아진 헌금을 모두 로마 돈으로 환전하지 않고도 그 나라에 있는 메디치 은행에서 장부상으로 기록하고 지급하면 되는 것이라 새로운 투자 없이도 큰 환차익을 볼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이때 메디치 은행이 관리하던 교황청 자금은 우리 돈으로 약 4조 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교황청도 절약된 환전 수수료로 성당을 짓고 예술 작품을 구매할 수 있었으니 이 역시 르네상스 활성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더욱이 교황에게 헌금 도난 방지와 현황을 수시로 알려줌으로써 교황청과 신뢰도 쌓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부자 고객들에게는 교황청이 거래하는 최고 은행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다.
비에리 디 캄비오 메디치의 사례는 기존의 방법을 답습하지 않고 생각의 전환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투자 방법을 항상 고민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그 후 비에리 디 캄비오 메디치의 투자 및 자금 운용 철학은 그의 조카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에게 이어졌다. 

그는 은행 금고에서 잠자고 있는 돈을 활용해 또 다른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고민을 하다 무역사업을 하는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게 되었다.

당시 무역업자들은 배가 필요했으나 모든 자금을 배에 투자하고 나면 융통할 현금이 부족했다. 

이에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운송품들을 할인된 가격으로 사들였고, 그 물건을 팔아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즉 무역업자들에게 현금 유동성을 확보해준 반면 물건 판매의 이익을 공유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무역 산업은 더욱 활발해져 도자기와 차 향료 등 더 많은 아시아 물건들이 수입되었다.

 

 

3. 중세 경제와 문화를 이끈 메디치 가문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 피렌체, 더 나아가 이탈리아와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치 가문으로 지금까지도 인문학과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가문 중 하나이다.
메디치 가문은 원래 의사 가문이었으며 메디치라는 이름도 의사를 뜻하는 '메디쿠스 에서 유래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진료와 약 판매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모아 금융업에 전 출하게 되었다.
중세시대였던 당시는 지금과 같은 금융업의 개념이 없었고 돈을 빌려준 이후 이자를 받는 초기 대부업의 형태였다.
이때 메디치 가문은 대부업이 아닌 환전업을 시작으로 금융업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지중해 무역이 활발해져 서로 다른 화폐끼리 교 환이 필요한 시기에 메디치가는 통화의 교환과 중개역할을 했던 것이다.
메디치가 사람들은 시장 한편에 놓여 있는 긴 의자에서 환전을 했는데 그 의자를 가 리켜 '방카banca'라고 했으며 이것은 오늘날 은행 '뱅크'의 어원이 되었다.
실제로 메디치 가는 은행업을 영위하면서 은행 경영 체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코시모 메디치는 메디치 은행의 체계를 다른 은행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꾸어 은행계에 새로운 바람 을 일으켰다.
당시 피렌체에 소재한 은행들은 지점이 본점과 주종관계를 이루고 있었으 며 지점마다 같은 급여를 받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메디치 은행은 지점과 본점의 수익을 지분에 따라 분배하고 파트너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높여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형태의 운영을 해나갔다.
이에 은행 지점들은 더 많은 수익 창출을 위 한 영업 활성화에 노력했고 주인의식을 가지고 지점을 경영할 수 있었다.
메디치가가 유명해진 것은 차별화된 은행 경영으로 많은 부를 쌓았기 때문만이 아니 었다.
메디치 가문은 상인이자 정치가였던 조반니 디 비치 때부터 4명의 교황과 2명의 프 랑스 왕비를 배출했으며, 세계적인 문화와 예술의 전환점이 된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더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 많은 예술가들과 과학자, 문학가들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고 서로가 교류하면 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가치를 창출해냈다.
결과적으로 보면 메디치 가문은 사실상 은행 이라는 금융기관의 이익창출을 통해 오랜 기간 분야별 인재들을 후원하는 재단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 가문이라고 볼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의 투자와 역사에 대해서 알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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